시계의 가치는 주인에게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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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의 가치는 주인에게서 나온다
  • 2019.11.09 09:00
수능 때나 차고 버리는 싸구려 전자시계였던 카시오 시계는 이제 '손석희 시계'로 알려져 자만스러운 검소함의 상징이 되었다. 수천만원짜리 명품시계를 자랑하는 이들에게 통쾌한 백태클을 가한 카시오 열풍 속 심리학적 원리를 찾아본다. 심리학자의 시계이야기 두번째.

조우

한 남학생이 진로상담을 청하며 내 연구실을 찾아왔다. 한 눈에 봐도 심리학을 진지하게 전공하려는 학생이다. 과도한 진지함이 나를 짓누른다

제일 먼저 그의 손목에 눈이 꽂힌다. 카시오 전자시계. 속칭 손석희 시계를 차고 있다. 정말로 이 시계가 패션 아이템이 될 줄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손석희 시계로 알려진 카시오 전자시계. 쓰고 버리는 전자시계가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손석희 시계로 알려진 카시오 전자시계. 쓰고 버리는 전자시계가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손석희 시계로 알려진 카시오 전자시계. 쓰고 버리는 전자시계가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카시오가 지금도 팔고 있는 2만원대의 100미터 방수 다이버 시계는 이 가격에 출시되었다는것을 믿기 어려운 기능과 디자인을 탑재하고 있다.

2만원이 채 안되는 전자시계는 이 시대의 오피니언 리더인 손석희의 손목에 채워지면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그의 손목에 채워진 카시오는 더이상 촌스러움의 상징도, 가난함의 상징도 아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를 자기 손에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자가 가진 자만스러운 검소함의 상징이 되었다.

모델링

청소년과 성인이 된 소위 '머리가 굵어진'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심리학적 기법으로 '모델링'이 있다. 모델이 특정 행동을 할 때 보상받는 것을 제3자가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제3자는 그 행동을 학습하고 실행할 수 있다는게 간단한 설명인데, 당시의 손석희 같이 사회적 존경과 매력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차고 있는 시계를 나도 차게 되면 왠지 그와 비슷한 가치의 사람이 된 것 같은 긍정적 체험을 하게 된다. 모두가 롤렉스와 테그호이어의 광신도로 살아갈 때, 내 손목에 찬 카시오는 내가 너희들과는 다른 클래스의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주었을 것이다.

나의 카시오

생각해보면 같은 모델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카시오가 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싼 다이버 시계인 MRW-200HC.

카시오가 지금도 팔고있는 2만원대의 100미터 방수 다이버 시계. 이 가격에 출시되었다는것을 믿기 어려운 기능과 디자인을 탑재하고 있다
카시오가 지금도 팔고있는 2만원대의 100미터 방수 다이버 시계. 이 가격에 출시되었다는것을 믿기 어려운 기능과 디자인을 탑재하고 있다

이 시계는 정말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다가 사게되었다. 그냥 봐도 장난감같은 색상과 디자인의 이 시계가 무려 100미터 방수가 된다고 써 있었다. 심지어 배젤이 회전이 된단다. 10만원 미만의 가격대 국산시계에서 이런 기능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난 그냥 속는 심정으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 설령 침수가 된다 해도 나의 손실은 25천원이 다 이기에.

도착한 시계는 기대 이상으로 귀여웠다. 이 뽀얀 화이트는 우레탄 소재가 아니면 절대 낼 수 없는 색상이다. 무려 데이 데이트 기능을 지원하고 초침은 정확히 눈금을 가르친다. 무엇보다도 팔에 차면 그 사정없이 뿜어져 나오는 귀여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너무 늙어버린 주인의 모습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나는 왜 이런 시계를 20대때 만나지 못했을까?

이 시계는 전천후 툴워치의 기능을 해주었다. 등산을 갈때도 워터파크에서도 심지어 바다속에서도 이 시계는 언제나 함께였다. 경포대의 성난 파도속에서도 이 시계는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과연 어떤 용자가 서브마리너를 차고 경포대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이 시계는 진정한 다이버 워치임이 틀림없다. 2만원의 기적을 만든 카시오는 그 국적을 떠나 분명 위대한 기업임에 틀림없다.

모델링의 조건

연구실에 이 시계를 차고가면 우리 대학원생들의 반응은 너무 귀엽다는 긍정적 반응과 이런 거 차고 다니지 마시라는 부정적 반응이 교차했다. 하긴 귀여움을 떠나서 내 나이에 맞지 않는 시계인지도 모른다. 결국 내 바람과 달리 우리 학교에서 누구도 이 시계를 구매하지 않았다. 모델링이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모델링의 실패를 논하기 전에 카시오를 구매하는 행위가 모델링에 적절한 행위인지를 먼저 검토해 볼 필요도 있다.

모방학습은 통상적으로 '기술'을 학습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흔히 사용된다. 자폐스펙트럼장애 환자들에게 모델링을 통해 비디오게임을 즐기는 법을 학습시킨 Spriggs(2016) 등은 기술을 습득하게 하려거든 그 행위를 기꺼이 하고자 하는 흥미와 동기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나의 시계를 보고도 이 시계를 사려는 동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인가..! 

이제 와 생각해보면손석희는 시계를 고르는 기술을 가르치는 좋은 모델이었고, 그의 시계는 그의 높은 매력도와 연결된 '조건자극'이기도 했다. 아쉽지만 내가 찬 카시오 다이버는 ''라는 '무조건자극'의 한계로 인해 '매력'이라는 '무조건반응'을 충분히 유발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결국 주인이 문제다

나는 손석희가 아니다. 나는 이 시대 성공한 심리학자의 상징이 아니라 그냥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심리학계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내 손목의 카시오는 자신감과 성공의 긍정적 이미지를 끌어내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자극과 함께 한 죄밖에 없다.

집사람은 나이에 걸맞지 않고 심지어 저렴해 보이는 이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을 늘 못마땅해 했었다결국 이 시계는 4달만에 내 결을 떠나 다른 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도 내 마음속 카시오는 최고의 다이버 워치이다. 어느 장소에도 당당하게 차고 나갈 수 있는 나의 분신이었다이 시계의 가치는 2만원으로는 절대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주인이 그 가치를 올려주지 못했을 뿐이다.

미안하다 카시오. 새 주인은 꼭 너를 최고의 명품 다이버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mind

최승원 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덕성여대 심리학과 부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임상심리학은 반드시 생물-심리-사회적 접근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기에 언젠가는 심리학이란 이름보다 더 발전적인 개명이 필요하다고 믿는 심리학자. 상담센터와 정신과병원을 거쳐 대학에 와있는 이분야 진로탐험의 교과서적인 인물이나 진로상담보다는 괴팍한 연구자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람. 기분장애와 B군 성격장애가 주요연구관심분야이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떤 곳에서든 최선을 다할 멀티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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