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한 남학생이 진로상담을 청하며 내 연구실을 찾아왔다. 한 눈에 봐도 심리학을 진지하게 전공하려는 학생이다. 과도한 진지함이 나를 짓누른다.
제일 먼저 그의 손목에 눈이 꽂힌다. 카시오 전자시계. 속칭 손석희 시계를 차고 있다. 정말로 이 시계가 패션 아이템이 될 줄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손석희 시계로 알려진 카시오 전자시계. 쓰고 버리는 전자시계가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카시오가 지금도 팔고 있는 2만원대의 100미터 방수 다이버 시계는 이 가격에 출시되었다는것을 믿기 어려운 기능과 디자인을 탑재하고 있다.
이 2만원이 채 안되는 전자시계는 이 시대의 오피니언 리더인 손석희의 손목에 채워지면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그의 손목에 채워진 카시오는 더이상 촌스러움의 상징도, 가난함의 상징도 아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를 자기 손에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자가 가진 자만스러운 검소함의 상징이 되었다.
모델링
청소년과 성인이 된 소위 '머리가 굵어진'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심리학적 기법으로 '모델링'이 있다. 모델이 특정 행동을 할 때 보상받는 것을 제3자가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제3자는 그 행동을 학습하고 실행할 수 있다는게 간단한 설명인데, 당시의 손석희 같이 사회적 존경과 매력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차고 있는 시계를 나도 차게 되면 왠지 그와 비슷한 가치의 사람이 된 것 같은 긍정적 체험을 하게 된다. 모두가 롤렉스와 테그호이어의 광신도로 살아갈 때, 내 손목에 찬 카시오는 내가 너희들과는 다른 클래스의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주었을 것이다.
나의 카시오
생각해보면 같은 모델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카시오가 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싼 다이버 시계인 MRW-200HC다.
이 시계는 정말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다가 사게되었다. 그냥 봐도 장난감같은 색상과 디자인의 이 시계가 무려 100미터 방수가 된다고 써 있었다. 심지어 배젤이 회전이 된단다. 10만원 미만의 가격대 국산시계에서 이런 기능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난 그냥 속는 심정으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 설령 침수가 된다 해도 나의 손실은 2만 5천원이 다 이기에.
도착한 시계는 기대 이상으로 귀여웠다. 이 뽀얀 화이트는 우레탄 소재가 아니면 절대 낼 수 없는 색상이다. 무려 데이 데이트 기능을 지원하고 초침은 정확히 눈금을 가르친다. 무엇보다도 팔에 차면 그 사정없이 뿜어져 나오는 귀여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너무 늙어버린 주인의 모습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나는 왜 이런 시계를 20대때 만나지 못했을까?
이 시계는 전천후 툴워치의 기능을 해주었다. 등산을 갈때도 워터파크에서도 심지어 바다속에서도 이 시계는 언제나 함께였다. 경포대의 성난 파도속에서도 이 시계는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과연 어떤 용자가 서브마리너를 차고 경포대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이 시계는 진정한 다이버 워치임이 틀림없다. 2만원의 기적을 만든 카시오는 그 국적을 떠나 분명 위대한 기업임에 틀림없다.
모델링의 조건
연구실에 이 시계를 차고가면 우리 대학원생들의 반응은 너무 귀엽다는 긍정적 반응과 이런 거 차고 다니지 마시라는 부정적 반응이 교차했다. 하긴 귀여움을 떠나서 내 나이에 맞지 않는 시계인지도 모른다. 결국 내 바람과 달리 우리 학교에서 누구도 이 시계를 구매하지 않았다. 모델링이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모델링의 실패를 논하기 전에 카시오를 구매하는 행위가 모델링에 적절한 행위인지를 먼저 검토해 볼 필요도 있다.
모방학습은 통상적으로 '기술'을 학습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흔히 사용된다. 자폐스펙트럼장애 환자들에게 모델링을 통해 비디오게임을 즐기는 법을 학습시킨 Spriggs(2016) 등은 기술을 습득하게 하려거든 그 행위를 기꺼이 하고자 하는 흥미와 동기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나의 시계를 보고도 이 시계를 사려는 동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인가..!
이제 와 생각해보면, 손석희는 시계를 고르는 기술을 가르치는 좋은 모델이었고, 그의 시계는 그의 높은 매력도와 연결된 '조건자극'이기도 했다. 아쉽지만 내가 찬 카시오 다이버는 '나'라는 '무조건자극'의 한계로 인해 '매력'이라는 '무조건반응'을 충분히 유발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결국 주인이 문제다
나는 손석희가 아니다. 나는 이 시대 성공한 심리학자의 상징이 아니라 그냥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심리학계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내 손목의 카시오는 자신감과 성공의 긍정적 이미지를 끌어내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자극과 함께 한 죄밖에 없다.
집사람은 나이에 걸맞지 않고 심지어 저렴해 보이는 이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을 늘 못마땅해 했었다. 결국 이 시계는 4달만에 내 결을 떠나 다른 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도 내 마음속 카시오는 최고의 다이버 워치이다. 어느 장소에도 당당하게 차고 나갈 수 있는 나의 분신이었다. 이 시계의 가치는 2만원으로는 절대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주인이 그 가치를 올려주지 못했을 뿐이다.
미안하다 카시오. 새 주인은 꼭 너를 최고의 명품 다이버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