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세상의 모든 정인이를 위하여 _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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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세상의 모든 정인이를 위하여 _ 1
  • 2021.04.02 07:00
여러 편에 나누어 연재할 이번 칼럼에서는, 우선 정인이 사건을 다시 한번 재고해 보면서, 우리 모두가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는 ‘하나의 사회적 유기체’라는 의식을 가지고 “이웃으로서 할 수 있는일, 신고 체계”를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Opinion: 연재를 들어가며

영화 『조커』Joker,2019를 보지 않았습니다. 반사회적인 살인마의 불우한 과거를 조명한다고, 잔인한 살인 장면들이 있다고 누군가 말해주었는데 보고싶지가 않았습니다. 안봤기 때문에 실제로 그 영화가 어떤지는 모릅니다. 그 영화가 어떠한 영화인지를 떠나서, 저는 영화라는 매개체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회적 규범에 쉽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디어의 한 종류로이윤아,2019) 아직 정신적 가치가 바로 서지 못한 미성숙한 청소년들에게, 폭력이라는 행위가 어떤 맥락에서는 이해될 수 있는 시도로 전달되지는 않을까 걱정합니다. 혹은 반사회적인 사람들의 관점에서, 반사회성의 극단적인 행동을 조금이라도 미화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여지를 주게 되지 않을까 위험스럽게 느껴집니다 (영화 『조커』는 한국에서 ‘청소년 관람가’로 판정됐습니다. 반면, 폭력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미국영화협회에서는 『조커』를 ‘청소년 관람불가’로 판정했습니다). 어떤 한국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지금같은 시대에도 여전히 손찌검을 사용하는 장면들이 때때로 보입니다. 개그로 뺨을 때리는 것, 머리통을 치는 것은 과연 웃긴 것인가요이윤아 2019. 제3자는 웃을지 몰라도, 내 뺨을 맞고 그게 개그라고 한다면, 그래도 웃길까요. 텔레비전에서 손찌검하는 장면들을 쉽게 접할 수 없는 미국에 살면서도,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 중 하나는, 목에, 머리에, 칼을 꽂아놓고 피흘리는 분장을 하고,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연출하는 할로윈 복장입니다. 우리 시대를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생명의 의미 또한 발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죽음은 웃긴 것이 아니지 않나요. 우스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문화이든 개그이든 웃기지 않는 것을 웃기게 만드는 것이 저는 개인적으로 불편합니다. 

By 워너 브라더스, 공정 이용.
By 워너 브라더스, 공정 이용.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들의 불우한 과거와 어쩔 수 없는 환경들을 개인적으로 마주했을 때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주최한 학교폭력 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집단상담 후에, 학교폭력 가해자를 개인상담을 했는데, 부모를 상담에 개입시키려고 해도 부모가 바쁘다며 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방임의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그 아이는 방과후 가족같이 서로를 챙기는 비행청소년 무리와 어울려 놀았습니다. 상담했던 기간동안, 그 이후에도, 그 아이는 긴급연락처로 남겨준 연락처로 제게 종종 연락을 했습니다. 뭔가 구글에 쳐봐야할 것만 같은 궁금증들이 있을 때, 저에게 묻는 기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고 믿어주고 받아주기만 하는 상담선생님을 어찌보면 쉽게 생각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아이에게 호구가 되어도 상관없었습니다. 단둘이 만났을 때 뭔가 불량했던 느낌이 사라진 그 아이가 밉지 않았고, 오히려 안쓰럽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의 잘못된 행위를 고쳐주고 그 아이의 존재를 다독이고 싶었습니다. 그 아이는 이미 저에게 학교폭력 가해자가 아니라 부모로부터 방임된 또 한 명의 피해자였습니다. 도대체 그 부모는 어떤 사람들인지 화가 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부모만의 잘못일까요. 영화를 본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조커만의 잘못이 아니라고요. 그렇습니다. 그 아이와 그 부모 뿐만 아니라 조커를 만들어 낸, 혹은 방치한, 사회와 국가와 이웃의 책임 또한 있을 것입니다. 정인이 양모 또한 처음부터 괴물이었을까요. 

정인이 양모를 이해해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와 가정안에서의 폭력과 학대를 연구하며 알게된 것은, 폭력이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실로 참담하다는 것입니다. 그 폭력의 영향은 삶의 많은 영역에 걸칠 뿐만 아니라 끈질기게 깁니다. 그런데 이런 잠재적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이제는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정인이 양모는 누구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까요. “양모를 용서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사회와 국가와 저와 우리 모두는 지금 피해자의 편에서, 어떤 역할으로든 이 사건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요. 

그 죄 값은 받아야합니다. 그러나 제게 상담받던 아이를 가해자라는 이유로 그 아이가 겪어온 모든 삶의 짐을 오롯이 '그의 몫'으로만 지울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그 아이의 가해 '행위'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처벌적 정의Retributive Justice가 아닌 복구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실현하자는 의미입니다. 그 아이도, 정인이 양모도, 가해자를 가해자로 만든 배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키운 가정도 가정이지만, 학교와 사회와 국가가 그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피해자의 편에만 서서 '정죄'할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편에서도 지금의 그 사람 밖에는 만들 수 없었던, 이 무너진 사회를 함께 애통하게 여기고, 그 '책임'을 함께 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또다른 정인이를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도 어딘가 어둠 속에서 아파하는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는 일이 아닌가요.  

정인이 사건 이후에 우리 사회와 국가는 사회구성원들이 만족할 수준은 못 되어도, ‘보여주기 식의 행정’이라고 해도, 일말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임시방편이라도 법을 제정하고 뭔가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또다른 정인이가 나오기 전에, 더 늦기전에, 그들의 이웃인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한번쯤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방치한 이웃은 없는 걸까요. 나의 무관심이 우리 사회의 정인이 양모와 정인이를 만들지는 않았는지, 내 주위에 나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와 엄마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 아이가 말을 안듣는다고 가르쳐야 한다면서 가끔씩 손찌검하는 내 손에 정인이 양모의 거친 손이 숨겨져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 보자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신체적 폭력 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심리적 공격과 언어적 폭력을 일삼고 있지는 않은지, 만약 내가 사회적 규범에 영향을 미치는 공인이라면, 미디어를 제작하고 보급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회를 '폭력 무감증' 사회로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점검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합니다. 마음이 아프고 피하고 싶어서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우리 주변의 정인이 이야기를 이제 하려고 합니다. 

정인아, 미안해. 내가 바뀔게.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 이후, 우연인지 필연인지 학교폭력 미투 운동이 또한 일어나면서 “학대와 폭력이 우리사회에서 절대 허용되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조금씩 심겨지는 것 같아 정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글을 쓰는데 용기를 줍니다.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를 마주하며, 우리사회로부터 희망과 용기을 얻은 것 같습니다. 저도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자고 다독이며, 글을 엽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누구에게든지, 폭력과 학대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는 가치에 마음을 함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칼럼을 쓰는 중에도, 여전히 오늘을 힘겹게 살고 있을 또다른 정인이들을 마주합니다. 얼마 전에 3살된 아이를 집을 방치해 놓고 이사를 해서, 혼자 전기 끊긴 빌라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시신이 부패하도록 방치되었다는 사건에서 정인이를 보았습니다. 맡아서 키우던 열살짜리 조카가 말을 안듣고 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온몸을 때리고 목욕탕에서 물고문으로 학대해 숨지게 한 사건에도 정인이가 있더군요.

작년에 9살 남자아이를 여행용 가방에 넣고, ‘엄마 숨 못쉬겠어요’ 하는 말에 오히려 가방 위로 올라가 뛰고, 뜨거운 드라이기 바람을 불어넣어서, 그 아이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사건에서는, 정인이 양모를 마주합니다. 정인이 사건을 조명했던, 한겨울 1월에도 내복차림으로 길거리를 서성인 두 아이가 시민의 신고로 경찰에 인도되었습니다. 3살된 한 아이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채 대소변으로 젖은 내복차림으로 영하 15도의 날씨에 헤메이다가 한 시민에게 발견됐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 옆집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부모들에게서 태어나고 길러지는 아이는 도대체 누구로부터 보호를 받아야할까요. 한 아이를 보호하고 바르게 양육해야할 책임은 과연 부모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자격이 안되는 부모들에게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친권을 부여하고 나머지는 그저 뒷짐지고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버려야 하는 걸까요.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부모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와 국가, 그리고 학교와 이웃까지도 모두 한 아이의 양육책임자라는 인식의 변화가 아닐까 합니다.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포닥과정 때, 학교폭력에 관한 수업 프로포절이 상을 받으면서 어드밴스드 세미나 수업으로 심리학과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 프로포절 서문을 쓸 때, 제가 속해있던 학교의 학부졸업생인, 정치철학자 마이클 센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존 롤스의 평등한 사회를 위한 주장이었는데, 그의 주장은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고, 서로의 운명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만약 "우리가 우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선천적인 요소나 어떤 이득이 되는 가정환경 요소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것을 내가 사용한다고 한다면, 그 행위는 나 뿐만 아닌 내가 속한 공동체에 이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습니다. 이 구절이 와닿았던 이유는, 학교폭력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위험요소가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통계적으로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기 쉽지만, 그 외 “다수의 비교적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란 아이들”의 역활이 한 학급의 학교폭력과 괴롭힘의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요소가 되더란 것입니다. 

학생들의 실제 생활에서, 불링 행동학교폭력과 괴롭힘, 왕따를 모두 지칭이 일어날 때, 불링은 ‘하나의 그룹 안에서 구성원들 간의 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외에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으로, 가해자의 불링행동이 저지될 수도, 불링행동이 장려될 수도 있습니다. 반에 있는 평범한 아이들이, 피해자의 편에서 약자를 보호해주는 “방어자”가 되어주느냐, 혹은 반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나몰라라 하는 “방관자”가 되느냐, 아니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해자의 가해행위를 돕거나, 옆에서 보고 웃거나 응원하는 말로 강화하는 “지지자”가 되느냐에 따라서 그 반 전체가 친사회적 규범을 따를 수도 있고, 반사회적 규범을 따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학급의 규범이 친사회적이냐, 반사회적이냐에 따라서 학교폭력과 괴롭힘의 정도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이렇게 중요한 사명을 띈, 비교적 평범하게 자란 아이들에게, “너희의 역할이 중요하다, 결코 방관자가 되서는 안된다, 피해자의 편에서 반사회적 힘을 저지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너희 학급 전체 분위기가 달라지고,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좋은 환경안에서 너희 모두가 건강하게 발달과업을 이룰 수 있다”는 그 가치를 어떻게 설득시킬 수 있을까요. 

존 롤스의 말을 빌어, 그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네가 학대가 있었던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고, 너의 부모가 너를 방임하지 않았고, 네가 만약 네 주위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더 나은 환경적 요소를 지녔다고 생각한다면— 네가 조커가 되도록 키워지지 않았다면— 가정적 환경적 이득을 통해 얻게 된 너의 재능을, 학급이라는 이 사회 집단에 조금이라도 ‘나누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네가 단지 '악을 행하지 않는 것'don’t be evil으로는 충분치가 않다고, '선한 일을 해야한다'do the right thing ”고 말입니다 (구글의 슬로건이 그렇듯이요). 결국 하나의 큰 학급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반사회적인 행동들을 바라보며 “쯧쯧, 저런 인간들이 인간이냐” 혹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정죄하거나 경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해결할 수 있다!

만약 나에게 우연히 남보다 좋은 환경적 요소나 비교적 건강한 성격이 주어졌다면, 그래서 나에게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도울 수 있는 마음이 든다면, 격려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이타적으로 양보할 수 있는 넓은 아량이 있다면, 시기질투하기 보다 타인을 인정하고 칭찬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갈등이 있는 곳을 이어줄 수 있는 피스메이커의 재능이 내게 있다면, 그러한 힘과 재능이 나의 이득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득을 위해서도 사용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연구들은 반사회적 행동에 대한 처벌과 제재 보다는, 긍정적 행동을 불러오는 친사회적 행동의 모델링과 경험 및 학습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예들로 구성된 친사회적 행동들이 서로에게 모델링되고 실체화 될 때, 그것이 바로 반사회적 행동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만약, 상담하던 그 아이 주위에 이런 친사회적인 어른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래서 그 아이가 이런 행동들의 유익함을 경험한 수혜자였다면, 이런 행동을 배우고 학습하고 모방하며 자랐다면 어땠을까요. 정인이 양모, 정인이의 상황 또한, 달라졌을지 모를 일입니다. 

한 정치철학가의 정치적 이념이나 신념을 떠나, 모두에게 안전하고 질서있는 친사회적인 사회for common good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집단 효능감'collective efficacy이 중요합니다. 특정 상황에서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함께 힘을 모으면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을 의미하는 “집단 효능감”을 저는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를 통해 보았습니다. 이 집단 효능감의 첫걸음은, 바로 우리가 함께 사회적 규범과 문화를 이루어가는 유기체로서, 각 개인의 역량들이 모여 하나의 긍정적인 힘을 이루어갈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각 개인들이 서로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타인의 삶에 훨씬 더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는 인식일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집단 효능감을 응원하며, 얼마전 메모해 두었던, 우연히 읽은 한 작가 미상의 글을 이곳에 나눕니다.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에 참여했던 분들, 또 현장에서 가슴아파하며 목소리를 내셨던 분들, 이 학대의 문제를 이제는 다같이 좀 해결해보자고, 하나의 긍정적인 힘을 기대하고 믿었던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건네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Your impact on other people is bigger than you think. Someone still giggles when they think of that funny thing you said. Someone still smiles when they think of the compliment you gave them. Someone silently admires you. The advice you give has made a difference for people. The support and love you’ve offered others has made someone’s day. Your input and opinions have made someone think twice. You are not insignificant and forgotten. Your existence makes a positive difference, whether you see it or not.

타인에 대한 당신의 영향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큽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농담을 생각하며 아직 낄낄거리고 있을것이고, 누군가는 당신이 했던 칭찬을 기억하며 웃음짓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당신을 뒤에서 존경하고 있고, 당신이 했던 조언들은 그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여준 사랑과 지지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고, 당신의 의견과 충고들은 누군가의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중요하지 않거나 하찮은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모를수도 있지만, 당신의 존재는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신고

여러 편에 나누어 연재할 이번 칼럼에서는, 우선 정인이 사건을 다시 한번 재고해 보면서, 우리 모두가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는 ‘하나의 사회적 유기체’라는 의식을 가지고 '이웃으로서 할 수 있는일, 신고 체계'를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바로 다음 편에 기재되어서 바로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2019년 보건복지부 아동학대 연차보고서 통계에 의하면mohw.go.kr, 아동학대 신고 건수는 4만 1389건으로 전년보다 13.7% 증가했고, 발생장소의 79.5%가 집이었다고 합니다. 그 만큼 학대가 숨겨진 곳에서 일어나기에, 아동학대 전문가와 경찰 뿐만 아니라 학교와 이웃,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피해아동 발견율은 2019년 3.8%, 2018년3%로, 학대피해 아동을 조기발견 하는데에는 여전히 미흡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미국과 호주의 1/3 수준에 불과합니다EBS 2020. 9. 30 뉴스. 특히 서울지역의 학대아동 발견율은 전국의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1.7%, 그 실태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정익중 교수는 그 뉴스에서 "학대 상황을 맞이하고도 이게 학대인지 아닌지 가늠을 못하는 경우에는, 신고를 먼저 해야한다. 학대 여부의 판단은 신고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우리나라 신고문화의 활성화를 촉구했습니다. 

추운 겨울 길가다가 내복차림으로 서성이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신고문화 활성화를 위해 중요한 것은, 신고했을 때 이웃으로서 어떠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는지에 대한 법적 정보 (특히, 학대하는 지인을 알고 있을 경우에는 더 고민이 될 수 있습니다)와 신고절차, 그리고 학대 아동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 잠재적 학대 아동과 어떻게 효과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일 것입니다. 관련해서,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아동학대 신고체계에 대한 실질적이고 포괄적인 정보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무엇이 훈육이고 무엇이 학대인가

그 이후의 연재에서는 심리연구들 중심으로, 학계에서 말하는 가정내에 훈육과 학대의 경계(무엇이 훈육이고, 무엇이 학대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훈육이라고 사용하는 부모의 손찌검, 과연 괜찮을까요? 미리 본다면, 부모의 신체적 처벌과 신체적 학대 사이의 긍정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들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연구자들은 부모가 아이를 신체적으로 처벌할수록, 더 쉽게 학대로 발전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사실상 체벌의 긍정적인(?) 면은 부모말에 즉각적으로 복종하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매를 드는 부모가 두려워서 하는 아이의 복종은, 이미 부모와의 연대가 끊어져버렸기 때문에, 정작 매를 들게 하는 이유(부모의 도덕성과 가치를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를 아이가 내면화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부모의 체벌이 아동청소년의 발달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들 또한 잘 알려져있습니다. 저는 아시아인들한국인과 중국인과 미국내 주요 인종그룹들백인, 흑인, 히스패닉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체벌이 공격성Lee & Watson, 2020과 학교폭력Lee, Watson, & Lee 2015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사회적, 발달적, 정서적, 인지적 영역에서의 영향들 또한 심각합니다. 체벌이 문제행동을 줄이는 데에 효과가 없으며, 바람직한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도 효과가 없다면, 우리가 과연 체벌을 사용해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체벌의 부정적 영향들과 더불어, 체벌 대신 취할 수 있는 다른 대안들은 없는지, 효과성이 확인된 자녀교육방법들 또한 소개할 예정입니다. 

높은 신체적 학대율의 이유

이 후의 연재 중 한편에서는 아동학대에 대한 문화적 차이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신체적 학대가 더 많이 일어나는 이유를 조명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신체적 학대경험이 많게는 미국보다 3배나 높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나라의 뿌리깊은 손찌검/매 문화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요. 각 문화에서 어떠한 실질적 예들을 학대로 정의하는지를 한국인과 미국인과 한국계 미국인들Korean American에게 직접 쓰도록 설문한 적이 있습니다Lee, Jang, & Malley-Morison, 2008. 학대의 심각성을 고려해서 추후분석한 연구결과에 의하면Lee, Malley-Morison, Watson, & Jang, 2014, 한국인과 가장 다른 결과를 보인 집단이 미국인이 아니라, 같은 뿌리를 가진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을 뿐만 아니라, 학대의 정의에 대한 문화차이도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간단히 미리 보자면, 미국인백인계 미국인과 한국계 미국인은 모두 신체적 학대를 한국인보다 더 많이 언급하는 경향이 있었고, 반대로 한국인은 그들보다 심리적 학대와 방임을 더욱 학대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모든 심각성 척도에서 미국인은 한국인보다 신체적 형태의 학대를 유의미하게 더 많이 언급했지요. 이것은 다른 연구들에서도 지적되었듯이 한국인에게 ‘사랑의 매’라는 부모의 신체적 처벌이 사회적인 규범normativeness으로 더욱 통용되고 있기에, 그만큼 ‘손찌검’과 같은 신체적 공격을 ‘학대’라고 여기지 않는 한국인의 성향을 대변해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회문화 안에서, 정인이 사건 이후에 폐지된 민법 915조 '자녀 징계권'은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부모의 옳바른 가치와 도덕성, 원칙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부모가 해야할 역활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를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사회가 자녀에 대한 신체적 제재를 더이상 가하지 말라는 메세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새롭게 맞이하고 있는 이 시대에서, 부모가 원하는 바람직인 행동들을 아이들이 어떻게 학습할 수 있을지, 효과적인 대안들을 고려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학대경험의 심각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앞선 연구결과가 사람들의 '인식'에 존재하는 학대종류에 대한 문화적 차이를 말해준다면, ‘과연 신체적 학대는 심리적 학대나 방임보다 아동에게 “더 심각한 경험”일까요? 학대경험의 심각성을 어떻게 잴 수 있을까요? 학대경험의 심각성의 측면에서, 학대의 종류에 따른 위계가 있을까요. 어떤 학대경험이든 더 많이 하는 것과 적게하는 것의 차이로 심각성을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 어떤 학대 경험은 그 자체의 심각성이 다르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성적 학대를 당한 것이 심리적 학대나 방임을 당한 것보다, 그 심각성이 크기에 아동의 발달에 더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질문들을 가지고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예를 들면, 성적학대 > 신체적 학대 > 심리적 학대나 방임의 순으로). 그런데 학대경험이 관찰된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에서, 크게 70-90% 정도로 여러가지 학대가 같이 일어나는 동반률co-occurrence을 보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심각성에 대한 평가는 생각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학대아동이 보일 문제행동들을 미리 예측하기 위해서, 또한 아동학대 전문가, 학대전담 공무원, 그리고 전문임상치료가들에게 도움이 될 치료적 목적으로, 정확한 평가와 진단은 필수입니다. 잦은 학대 경험 뿐만 아니라, 어떤 심각한 타입의 학대를 받은 아동은 그 현재와 미래에 더욱 부적응적 행동을 보일 수 있는데, 모든 종류의 학대가 동일한 발달 후유증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추후 연재에서는 한 문화 내에서 ‘학대 종류에 심각성에 따른 위계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Lee, Malley-Morison, Watson, & Jang,  2014과 더불어, 학대의 평가적 측면에서, 여러가지 아동학대경험과 그에 대한 아동의 부정적 결과를 따져서 심각성을 분류하는 학대분류 방식Hahm, Lee, Ozonoff, & Van Wert, 2010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분류방식들이 학대 전문가들과 공무원들, 또한 경찰과 보호시설에서 일하는 스태프들까지, 아동의 피해정도를 인식하고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진단과 치료를 받도록 도움을 주는 것을 너머, 우리사회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심리적, 정서적, 언어적 학대와 방임의 심각성과 발달 후유증을 깨닫는데, 이해를 더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기회가 된다면 반사회적 규범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미디어 공격성과 우리나라 미디어의 '폭력 무감증'에 대해서 다시한번 되짚으며 연재를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제가 연구했던 논문결과들과 더불어, 각 분야의 유용한 심리연구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만약 내가 학대받은 아동이었다면…

아마도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학대경험이 있으신 분들이 있으실 거라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학대를 당했더라도, 도움을 받으면,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개발하면서 과거의 경험들을 극복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발판삼아 더욱 성장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일화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회복탄력성 연구는, 어린 시절 힘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이들’은 그러한 상황에서 비교적 일관적으로 잘 적응하면서 자신감있고 긍정적인 성인이 되는 것을 보고, 그 아이들이 비슷한 어려움에 처한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어려움을 극복하게 한 요인들이 과연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연구에서 탄력성을 말할 때 의미하는 시련과 역경의 환경이란, 주로 정신적인 장애, 또는 가정환경 내에서의 경제적, 정서적 어려움이나 부모의 학대, 이혼, 무관심, 정신병리나 약물남용 혹은 결손가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때로 실증적 연구들에서는 발달과정에서 겪은 의미있는 부정적인 경험들과 더 넓게는 전쟁이나 기아 등의 외부 환경까지도 포함합니다. 초기 연구자 중 하나인 에미 베르너Emmy Werner교수는 종단 연구를 통해, 이러한 어려움에서도 탄력적인 아이들의 개인적 특성, 가족적 특성, 그리고 그들이 속한 지역사회적 특성을 발견했습니다. 그 이후의 발달심리와 임상심리 분야의 많은 연구들을 통해, 탄력성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구분되기보다dichotomy approach, 탄력성은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성향으로continum approach, 사고나 행동으로 학습되고 개발될 수 있는 것으로 인지되고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 탄력적 성향을 가지고 있고, 실패와 역경 가운데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을 향한 내면의 “적응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어린시절 힘든 환경 가운데 자랐다 하더라도, 누구라도 그런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을뿐 아니라 오히려 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또한 학대와 방임의 가정에서 자랐다고 해도, 모든 학대당한 아이들이 학대부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대아동이 부모에게 당했던 폭력을 정당화하며 성인이 된 후에 자식을 학대할 확률이 높다는 것은 연구들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지만, 오히려 자기가 겪은 것을 자기 아이가 겪지 않도록 강한 동기를 가진 부모들도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강한 동기를 가진 부모는 곧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어린시절의 시련과 어려움과 맞닥뜨렸지만 회복한 사람들이, 즉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이, 보다 친사회적이고 주위사람을 이타적으로 돌보고 돕는 성향이 높았다는 연구결과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주는 친사회적 행동을 통해서, 우리사회의 집단효능감을 응원하며 힘을 싣자는 것에, 포함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mind

   참고문헌

  • 이윤아, (2019). 사이버 불링, 너무나 지독한 미로 2. 내 삶의 심리학 mind. http://www.mind-journal.com.
  • Lee, Y., & Watson, M. W. (2020). Corporal Punishment and Child Aggression: Ethnic-Level Family Cohesion as a Moderator. Journal of Interpersonal Violence, 35(1516), 26872710.
  • Lee, Y., Watson, M. W. & Lee, K. (2015). The relation of physical discipline to bullying behaviors across different families and ethnicities. Students, Teachers, and Leaders Addressing Bullying in Schools. Las Cruces, NM: Sense Publishing,
  • Lee, Y., Jang, M., & Malley-Morison, K. (2008). Perception of child maltreatment in European American, Korean Americans, and Koreans. International Psychology Bulletin, 12, 13-16.
  • Lee, Y., Malley-Morison, K, Watson, M. W., & Jang, M. (2014). Hierarchies of child maltreatment types as a function of perceived severity in European Americans, Korean Americans and Koreans. Children and Youth Services Review, 46, 220-229 (Research Question 2)
  • Lee, Y., Malley-Morison, K, Watson, M. W., & Jang, M. (2014). Hierarchies of child maltreatment types as a function of perceived severity in European Americans, Korean Americans and Koreans. Children and Youth Services Review, 46, 220-229 (Research Question 1)
  • Hahm, H. C., Lee, Y., Ozonoff, A. & Van Wert, M. J. (2010). The impact of multiple types of child maltreatment on subsequent risk behaviors among women during the transition from adolescence to young adulthood. Journal of Youth and Adolescence, 39, 528-540.
이윤아 전 Barnard College, Columbia University 심리학과 교수 발달심리 PhD
연세대와 Boston University에서 석사를 마친 후, Brandeis University에서 발달심리학으로 박사를 받고 포닥 과정을 밟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후 Barnard College of Columbia University 심리학과에서 조교수(텀)로 재직하다가 사임하고, 내쉬빌로 이주해 결혼하여, 현재는 학교폭력 방지를 위한 "친사회성 개발서"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포닥과정 때 참여했던 Harvard Medical School/Children's Hospital Boston의 학교폭력예방 연구팀이 개발한 불링 프로그램의 한국어버젼 제작을 기획하고 있다. NICHD (National Institute of Child Health and Human Development) 종단연구 프로젝트의 협동연구자로, 문화간 아동 및 청소년 학교폭력과 공격성, 그리고 가정내 신체적 처벌과 아동학대를 주로 연구해 왔고, 미디어 영향과 발달의 관계에도 관심을 가져왔다. 한국에서는 연세대 심리상담센터와 한국가족상담센터에서 수련을 받은 상담심리사(2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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