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다 거짓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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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 거짓말이었을까
  • 2020.03.11 13:24
모든 상담과정은 특별하다. 내담자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여과없이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하물며 진한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관계면 오죽하랴. 비록 그의 말 모두가 사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의 기록을 몇 년 후에 다시 읽어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글을 쓰기 전에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소개하려는 이 아이(가명: 수아)는 상담자인 나를 무척 혼란스럽게 했다. 상담하는 내내 수아에 대한 연민으로 중심을 잃었다. 사례발표 때 잘못된 상담이라고 분석 수퍼바이저에게 지적을 받았던 사례이기도 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알고 있다.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잘해서 왕따를 당한다는 이유로 상담을 의뢰했는데, 어쩌면 나도 그 아이에게 속아서 수아의 망상에 동참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속아주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수아가 하는 말을 다 믿어주었기 때문에 재잘재잘 잘도 이야기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정신분석 공부에 빠져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 수아의 사례를 열심히 기록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아마도 말을 막지 않고 잘 들어주었을 것이다. 개입을 하지 않은 덕분에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실과 '진실'을 분간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며 생긋거리던 아이의 까만 눈망울 때문인지도.

할머니가 보고 싶어요

수아와 동생 은아는 할머니가 키웠다. 엄마의 잦은 입원 탓이었다. 편집증과 조울증을 앓고 있는 엄마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약을 먹기 전까지는 수아를 많이 때렸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툭하면 엄마에게 맞았지만, 엄마가 심하게 때린다고 삼촌이나 이모에게 말하면 믿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가 나중에 할머니까지 때리자 할머니의 멍이 든 상처를 본 외삼촌이 격분해서 엄마를 강제로 입원시켜 버렸고, 그 뒤에도 입퇴원을 반복하다가 상담 당시에는 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수아의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의 사회사업실장을 알고 있던 터였다. 수아 어머니에 대해 물어보았다. 겉보기에는 여리고 가냘픈 작은 체구의 여성인데 굉장히 교양이 있고 고상하며, 말씨도 조용조용해서 폭력행동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을 시키면 태도가 돌변하며 눈초리가 변하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딸을 폭행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상담하던 그해 초. 수아의 할머니는 노인정에 다녀오셔서 피곤하다며 누우신 채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당시 수아는 할머니가 피곤해서 계속 주무시는 줄 알았다고 한다. 나중에 119를 부르고 외삼촌에게 연락을 했는데 빨리 연락을 하지 않아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며 야단을 맞았다고 했다. 그때는 아무 말 못하고 눈물만 펑펑 흘렸다고 했다. 아빠는 어릴 때 집을 나가서 기억에도 없고 할머니가 엄마 같다고 했다. 서너 살 때부터 할머니랑 같이 살던 집에 할머니가 안 계시니 갑자기 무서워져서 이사를 했고, 생활비는 외삼촌이 보내주어서 동생과 둘이 원룸에 산다고 했다. 한번은 나도 모르게 그 집 앞에까지 간 적이 있었고, 할머니가 무척 보고 싶어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Daler Usmonov (1987~, Tajikistan), 'SOLITUDE', 2015, Oil on Canvas, (c)Lucianon Benetton Collection.

아무도 나를 믿지 않아요

수아는 말했다. “엄마가 비가 오면 나를 많이 때렸다. 한번은 허리띠로 내 목을 조르는데, 할머니가 말리자 엄마가 밀쳐서 갈비뼈를 다치셨다. 외삼촌이 그걸 보고는 119에 신고해서 엄마는 바로 정신병원에 가고 할머니도 병원에 실려갔었다." 나는 이렇게 힘든 이야기를 제일 친한 친구에게 했는데 그 애가 반에서 떠벌렸고 아이들이 그때부터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하면서 괴롭혔다고도 했다. 그 일로 애들과 싸우다가 복지사 선생님께 말했고, 담임 선생이 마련한 자리에서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담임이 못 믿겠다면서 동생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단다. 그때 정말 기분이 나빴다며 “뭐, 그 애들은 겪어보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아무리 사실이라고 한들 자기들 눈으로 보질 않으면 못 믿을 거예요”라고 담담히 말했다.

수아는 상담을 하러 올 때마다 옷차림이 달랐다. 처음엔 허름한 교복 차림, 그 다음엔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 또 한 번은 화장을 짙게 하고 왔기에 언제부터 화장을 했는지 물으니, "초딩 4학년 때 이미 다 했어요"라고 했다. 술, 담배, 외박, 가출 등 다 했었는데 요즘은 안 한다며 웃었다. 그날 상담 중에 비가 와서 우산을 빌려주려고 하니, 투명한 비닐우산이 아니면 안 된다며 앞이 보이지 않는 우산은 불안하다고 했다. 비가 오는 것은 좋은데 엄마 생각이 나서 싫다고 했다. 왜 그런지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이랬다.

비가 오면 생각나요

“비가 오면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가 5살 때 끓는 커피주전자 물을 내게 뿌려 흉터가 남았는데 비가 오면 그 생각이 난다. 엄마가 평생 병원에서 안 나오면 좋겠다. 그런데 나를 걸레라고 하고 우리 엄마가 정신병이라는 소문을 낸 애가 있었다. 한 달간 너무너무 화가 나고 분이 안 풀려서 그 애가 정신병이 있다고 거짓소문을 냈다. 그 애가 나한테 복수 할까 봐 검은 우산을 쓰면 무섭다. 컴컴하고 안 보이니까. 눈앞에 물체가 확인되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뒤통수 당한 경험이 떠올라 불안하다.” 수아의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매우 가슴이 아프고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런 말을 들으며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 분석가였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수아가 하는 말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거절을 했다. 외삼촌이 수급대상인 수아에게 나오는 생활비도 거의 다 가져가고 한 달에 20만원도 안 되는 생활비를 준다고 했다. 관리비와 학비 때문이라 돈을 더 달라는 말을 못 한다고 해서 "내가 말을 해 줄까?" 하고 물으니 거절했다. 외삼촌을 무서워한다고 했었는데 그날은 외삼촌을 엄청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삼촌도 무척 힘들 거라고 걱정을 했다. 그런데 그 뒤로 상담을 하러 오지 않았고 사회복지사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이제 상담을 안 해도 된다,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사실과 망상, 그 사이 어딘가의 진실

청소년상담을 하다 보면 상담보다 안전과 생계해결이 먼저일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내담자가 허락하는 경우에 한해 지역사회 서비스를 연결해주기도 한다. 수아는 서비스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상담도 거절한 셈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어린 나이일지라도 자신의 삶에 간섭하는 게 싫다는 것. 나도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급히 개입하다가 수아를 치료할 시기를 놓쳐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신도 엄마처럼 병을 앓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나도, 그 아이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mind

진혜전 다온심리상담센터와 대구드라마치료연구소 대표 상담심리 전공
1990년 3월 부터 26년간 대구광역시 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서 청소년상담을 하였고 2017년부터는 대구에서 다온심리상담센터와 대구드라마치료연구소를 운영한다. 계명대 교육대학원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하였으며, 대구가톨릭대에서 사회복지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사이코드라마소시오드라마학회 수련감독전문가로 청소년상담, 부모교육, 인간관계 갈등해결과 정신장애 재활을 위해 사이코드라마와 소시오드라마, 통합예술치료 적용을 위해 관심을 갖고 노력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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